말씀과 산책

인간의 일생 -이재철 1-(!)

비전무릎 2008. 1. 19. 11:24
인간의 일생 -이재철 1-(!)  

 인생- 그 삶의 두 길
 장례식에 갈 때마다 으레 떠오르는 단상이 있다. 장례용품과 관련된 것이다. 망자에겐 수의를 입힌다. 수의는 주로 삼베로 만들어지는데 삼베의 종류에 따라 수의의 가격이 달라진다. 최상품 삼베인 안동포로 제작된 수의의 가격은, 제일 싼 제품의 스무배에 달한다. 관도 마찬가지다. 오동나무, 홍송, 향나무에 이르기까지 재질에 따라 관의 가격 역시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아무리 최고가의 수의나 관이라 한들, 장례용품이란 오직 죽은 자를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장례용품은 단지 죽은 시체와 썩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죽음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중에는 가구나 건축재료로 다듬어져 산 사람을 위한 생명용품이 되는 나무도 있다. 삼베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비하면, 유독 죽음용품이 되어 시체와 더불어 썩어져 간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다. 가구나 건축재료 등 인간의 삶을 위한 생명용품용 나무는 얼마든지 재활용이 가는하지만, 죽음용품의 재활용이란 아예 불가능하다. 죽음용품은 처음부터 단 일회용으로 제작된다. 누구에게 물려주거나 물려받을 대상이 아니다. 도저히 수의를 구입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차라리 입고 있던 옷 그래도 매장될지언정 다른 시체에 사용되었던 수의나 관을 물려받는 예는 없다. 아니 관이나 수의가 재활용된 경우가 있긴 있었다. 옛날 무당이나 복술쟁이가 사람을 저주하는 부적을 만들 때, 가끔 무덤 속의 관이나 수의 조각을 부적의 재료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런 목적이 재활용이라면 도리어 재활용되지 않음만 못하다.
 비석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돌의 용도가 얼마나 다양한가? 정원석이 되어 자연미를 한껏 뽐낼 수도 있고, 공사장에 동원되어 문명의 이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이 비석으로 선택되는 순간 그것으로 끝이다. 한범 비석으로 다듬어진 돌은 다른 용도로는 쓰이지 않는다. 가령 무덤을 이장할 경우 비석을 가져가는 법은 없다. 그 자리에서 파손해 버리거나 아니면 땅속 깊이 묻어 버린다. 비석의 효용 역시 일회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베나 나무 그리고 돌 중에는 사람의 삶을 위한 생명용품이 있는가 하면, 단지 썩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죽음용품도 있다. 같은 산에서 함께 자라고, 같은 채석장과 같은 포목점에서 한데 어우러져 있었지만 이렇듯 생명용품과 죽음용품으로 확연히 갈라진다.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갈라짐이다.
 생명용품의 길이냐 죽음용품의 길이냐
 인생도 이와 같다. 인생은 한 번밖에 없는 기회라는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 그러나 그 한 번뿐인 인생을 많은 사람을 살리며 살아갈 수도 있고,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도리어 많은 사람을 해치면서 허망한 공동묘지로 치달을 수도 있다. 전자가 자기 인생을 생명용품으로 가꾸는 자라면, 후자는 오직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어리석게도 죽음용품으로 소진하는 자다.
 인생이라고 다 같은 인생인 것은 아니다. 생명용품으로 승화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죽음용품으로 단지 썩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인생도 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인생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다음과 같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첫째, 장례용품과는 달리 인생의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
 삼베 혹은 나무가 수의나 관과 같은 장례용품, 죽음용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자기 결정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들에겐 아무 결정권이 없다. 그 결정은 오직 제작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제작자의 결정에 따라 같은 산의 나무이건만 생명용품과 죽음용품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거 자기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죽음용품으로 제작되는 나무나 삼베가 한편으로 딱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시체와 함께 썩어지는 자기 역할을 조금도 마다치 않기에 그 앞에서 숙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인간이 자기 인생을 어떤 용품으로 일굴 것인지는 결코 타인의 결정 사항이 아니다. 그 결정권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소관이다. 자기 인생을 생명용품으로 승화시키는 것도, 죽음용품으로 허비해 버리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단 한 번밖에 없는 자기 인생을 아무 생각도없이 죽음용품으로 썩혀 버리는 인산보다 더 추하고 어리석은 자는 없다.
 둘째, 인생이 인간의 결정 사항이므로 인간에겐 절대적인 푯대가 필요하다.
 작년 초에 받은 연하장 중에 잊을 수 없는 카드가 있다. 발신자가 직접 만든 카드 속엔 신라시대 학자이자 최고의 문장가인 최치원의 한시가 적혀 있었다.
    笑指門前一條路(소지문전일조로)
    재離山下有千岐(재리산하유천기)
    웃으며 문 앞 외길을 가리키니
    겨우 산 아래에서 천 길로 갈라지네
 시골집 마루에 앉은 시인을 머릿속에 그려 보자. 그가 웃으며 싸리문 밖 외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눈길을 던져 보니 이게 웬 일인가? 바로 앞 산 아래에서 외길은 천 갈래나 갈라져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 지리적인 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인생을 읊고 있다.
 그렇다. 인생이란 언제나 외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다. 우리 앞엔 언제나 천 갈래 만 갈래의 인생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길 중에 우리 자신을 생명용품으로 일구어 주는 길은 언제나 한 길뿐이다.나머지는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모두 죽음의 길이다. 생명용품이 � 위한 그 한 길, 그 외길을 찾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푯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욕망은 바른 분별을 가로막는 벽이다. 그래서 욕망에 집착하면 할수록 미몽에 더 깊이 빠져,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죽음용품으로 헤매다 인생이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발의 등'이요 '길의 빛'이기에 그 말씀을 푯대로 삼기만 하면, 이 세상 천 갈래 만 갈래의 길 중에서 자신을 생명용품으로 일구어 줄 생명의 길을 바르게 분별해 낼 수 있다.
   내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이름을 위하여 의의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이것은 다윗의 고백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절대적 푯대로 삼았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의 길, 즉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것은 다윗 자신을 위함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였다는 것이 다윗의 고백이다.
 목사인 내가 어느 청년 그룹에게 성경을 가르친다고 치자. 그 경우, 나와 성경공부 하다가 인생을 망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더 큰 불명예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 그룹에 속한 청년들 중 단 한 병도 실족지 않도록, 아니 그들의 삶이 주님의 말씀 안에서 모두 새로워질 수 있도록 나의 명예를 걸고 그 청년들을 위해 나의 진액을 다 쏟아 붓지 않겠는가? 사람도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두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대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 인생의 절대적 푯대로 삼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그대를 반드시 생명용품으로 가꾸어 주신다. 이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 확인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 나이가 들면 육체는 쇠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푯대로 삼은 자의 심령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새로운 생명으로 넘친다. 그는 죽음용품이 아니라 생명용품인 까닭이다. 생명용품의 연륜이 깊어 갈수록 생명이 더욱 충일해짐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97년, 불과 닷새 간격으로 우리는 세계적인 두 여인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 중 한 명은, 이집트 출신 애인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즉사한 영국의 다이애나비다. 그때 그녀의 나이 36세였다. 그녀는 세계 최고의 왕가로 일컬어지는 영국 왕실의 왕세자비였고, 그녀와 함께 죽은 새 애인 알 파예드는 영국 재벌의 아들이었다. 그녀는 명실 공히 부귀영화와 젊음의 정점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순간에 죽었고, 장엄하기 그지없었던 그녀의 장례식은 공허하고 허무하기만 했다. 36년동안 자기만을 위해 살았던 그녀의 장례식에서 죽음용품 이외의 것을 볼 수 없었던 탓이다.
 다이애나비 사망 닷새 후, 인도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가 숨을 거두었다. 인도의 빈민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녀는 당시 87세의 노파였다. 젊은 왕세자비 다이애나에 비하면, 길이 팬 주름에 깡말라 광대뼈가 유독 두드러져 보이던 노파 테레사 수녀의 외모는 그야말로 볼품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소유가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사리 단 두 벌이 그녀의 전 재산이었다. 다이애나비와 테레사 수녀를 빅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어 보였다. 그러나 평생 초라해 보이기만 했던 그 노파의 장례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감동을 안겨 주었다. 테레사 수녀의 삶 자체가 곧 생명용품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그녀의 육체는 비록 후패했지만 생명용품이었던 그녀의 삶은 죽어서도 생명을 발하고 있었다.
 셋째, 한 인간의 인생은 역사의 지평을 뒤흔든다.
 한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어떤 용품으로 일구느냐는 것은 그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주위 사람은 물로니요 다가올 미래,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역사의 지평에까지 반드시 그 영향을 미친다.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보는 책 가운데『파페포포 메모리즈』가 있다. 그 책 지은이는 특수영상 기획자인 심승현 청년이다. 짧은 에세이와 만화로 구성된 책이라 쉽게 읽힌다. 그러나 쉽게 읽을 수 있다고 내용마저 가벼운 것은 아니다. 그 속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담겨 있다. 다음 에세이가 그 좋은 예이다.

    그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그 아이는 야구를 좋아했다.
    야구장에서는 꼭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나도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게 되었다.
    야구를 보면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새로 생긴 내 친구는
    야구장에서 나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 좋아한다.
 언뜻 대수로워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곱씹어 볼수록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A라는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 나는 아이스크림이나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야구광 A와 가까이 지내다 보니 그 친구의 삶이 나도 모르게 내게 전이되었다. 언제부터인지 틈이 날 때마다 야구장을 찾는 내 손엔 어김없이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친구 B와 단짝이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땐 B도 예전의 나처럼 아이스크림이나 야구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러나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B 역시 자연스럽게 아이스크림과 야구장을 즐겨 찾게 되었다. 이처럼 A의 삶의 부분이 나를 거쳐 B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중요한 것은 A는 자신의 삶이 B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그대의 삶은 그대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그대가 아는 사람은 물론이요 전혀 상상치도 못한 사람에게까지 반드시 영향을 미쳤고,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미칠 것이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나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동료 한 분이 3년 전 자기 소유의 집을 장만했다. 한국처럼 부동산 투기가 횡행하는 나라에서 봉급자가 정직하게 살면서, 비록 작은 크기나마 자기 명의의 집을 가진다는 것은 여간 근면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분을 만나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그분은 나의 축하를 '다 목사님 덕분입니다'란 덕담으로 받았다. 그분이 집을 사는 데 현실적으로 아무 도움을 준 적이 없는 내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사치레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진심이었고, 그분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1983년부터 나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분은 밤이면 밤마다 술독에 빠져 있는 나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던 나의 삶이 1984년 8월 2일 주님 안에서 180도 선회한 것은 그분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그 이전과 이후의 나의 삶이 그분에게 너무나도 판이해 보였던 것이다. 그때까지 교회를 다니긴 하면서도 선데이크리스천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분 역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 아예 주초를 끊어버렸다. 그로부터 햇수로 17년만에 자기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는 설명 끝에 그분이 말했다.
 "제가 그동안 밤마다 술독에 빠져 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 목사님의 삶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저도 크리스천답게 살기로 결심한 결과가 집으로 나타났습니다. 전적으로 목사님 덕분입니다."
 나는 그분과 함께 주님을 찬양치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분이 집을 사는 데 단돈 1원도 보태준 적이 없다. 집 장만을 권하거나 독려한 적도 없다. 더욱이 나의 삶이 그분에게 그토록 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곤 상상해 본 적조차 없다. 그런데도 나의 삶이 그분으로 하여금 한 가정의 책임있는 가장이 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삶이 그분에게만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그분의 자녀들을 생각해 보자. 지금처럼 성실한 가장인 아버지 슬하에서 사는 자녀들과, 예전처럼 술독에 빠진 아버지를 보고 성장하는 자녀들의 현재와 미래가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나의 삶은 그분을 거쳐 그분 자녀들의 삶, 그 자녀들의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내가 전혀 의식지도 못하는 가운데 말이다.
 1984년 8월 2일 나의 삶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아내를 통해서였다.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아내의 도움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다. 그이후 내가 목회자의 길을 걷는 동안 나로 인해 주님 안에서 인생관이 바뀐 분들이 적지 않다. 그분들 중에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분들도 있다. 아내는 결혼 이후 줄곧 합정동에서 살아왔다. 그런데도 아내의 삶이 나를 매개로 하여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분들에게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이것은 특정인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타인의 삶과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역사의 지평을 뒤흔들게 마련이다. 이 장에서 살펴보려는 구약성경 룻기의 강조점이 바로 이것이다.
 룻기에는 세 여인이 등장한다. 시어머니 나오미, 그리고 며느리 오르바와 룻이다.나오미는 본래 남편 엘리멜렉과 함께 이스라엘 베들레헴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오미 부부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모압으로 이민 가기로 하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모압에서 두 아들은 그곳 출생인 오르바와 룻과 각각 결혼, 그들의 이민은 성공적인 듯했다.
 그러나 이민 10년 만에 남편과 두 아들 모두 죽고 말았다. 졸지에 세 명의 과부만 남게 된 것이다. 나오미는 어쩔 수 없이 고향 베들레헴으로 되돌아갈 것을 결심, 두 며느리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그들의 베들레헴행이 그곳 출신인 시어머니 나오미에겐 고향을 되찾는 역이민이었지만, 모압 여인인 두며느리 입장에서는 타국으로의 이민 길이었다. 젊은 나이에 남편도 없이 물설고 낯선 이국의 삶과 부딪혀야만 하는 애처로운 신세가 된 것이다.
 한참 길을 가던 시어머니 나오미의 마음이 바뀌었다. 아들들이 살아 있으면 모르지만 다 죽고 없는 판에 젊은 며느리들에게 이국의 삶을 강요하는 것은 못할 짓이란 생각에서였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 개가하여 행복하게 살기를 권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어머니의 권유에 두 며느리는 펄쩍 뛰었지만, 거듭되는 설듯에 큰 며느리 오르바는 못 이기는 척 친정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러나 작은 며느리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랐다. 그것은 단지 고부간의 인간적 정분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풋1:16-17)
 룻이 죽기까지 시어머니를 따르려 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친정으로 돌아가면 육신적으로는 더없이 편하겠지만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 홀로 된 불쌍한 시어머니를 따르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었다. 그녀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가련한 시어머니 봉양을 구별하여 생각지 않았다. 이를테면 룻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순종키 위해 자기 생을 시어머니를 위한 생명용품으로 내어놓은 자였다. 그렇다고 젊은 며느리의 헌신을 시어머니가 당연시한 것은 아니었다. 고향 베들레헴에 재정착한 나오미는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라는 유대인과 개가토록 주선, 나오미의 배려로 룻은 새로운 사랑의 보금자리를 얻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룻4:13)
 하나님께서는 개가한 룻이 남편 보아스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해 주셨다. 그렇다면 쉽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늙은 시모를 위해 자기 생을 생명용품으로 내어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신앙심을 지닌 룻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녀의 삶이 행복한 결말로 끝났다고 말이다. 주요한 것은 구약성경 룻기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룻기 4장 16절에서 17절은 이렇게 계속 된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
    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아들을 얻은 룻은 외로운 시어머니 나오미로 하여금 자기 아이를 키우게 해 드렸다. 나오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본 동네 사람들은 아이를 오벳이라 불렀다. 지금 태어난 아이는 오벳뿐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아이를 가리켜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핏덩이 오벳밖에 없는데 성경은 그 핏덩이의 손자(핏덩이의 어머니 룻에겐 증손자)인,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먼 미래에 태어날 다윗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다윗이 누구인가? 이스라엘이 암울하던 시절, 그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한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렇다면 핏덩이 오벳과 함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다윗을 동시에 보여 주는 본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을 생명용품으로 일구었던 룻의 삶이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을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볼품없는 이방 여인이요 한 것이라곤 겨우 핏덩이 한 명 낳은 것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녀에 의해 지금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이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계속되는 룻기의 결론을 이렇다.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
    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
    고 솔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4:18-22)
 풋기는 다윗을 한 번 더 언급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런데 룻기의 결론으로 제시된 이 족보는 대체 무슨 족보인가? 마태복음 1장은 이 족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임을 밝혀주고 있다. 이 족보를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워졌다. 이것이 룻기의 결론이다. 자신의 인생을 생명용품으로 가꾸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통로로 삼아 인류의 역사를 반드시 새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3,000년 전 베들레헴 사람들은 나오미의 품에 안긴 핏덩이 오벳밖에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핏덩이의 어머니인 룻으로 인해 인류 역사의 지평이 새롭게 펼쳐지고 있음을 이미 보고 계셨던 것이다. 이 귀중한 사실을 일깨워 주는 룻기는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책이다.
 청년들이여, 잊지 말라. 모든 인간의 삶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드시 역사의 지평에 영향을 미친다. 그대의 삶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 그래의 삶에 따라 오늘의 결과인 미래의 모습이 달라진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소망이라 함은 우리의 삶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주님 안에서 생명옹품이 되기만 하면 무명의 룻이 그랬듯 우리로 인해 역사의 지평이 새로워질 것이기 때문이요, 두려움이라 함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우리 삶을 고작 죽음용품으로 일굴 경우 바로 우리 자신이 역사의 지평을 허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자와 허무는 자가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동일인일수도 있다.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은 그의 삶이 모든 면에 걸쳐 항상 옳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오직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그는 참 생명이 넘치는 생명용품이었고 그의 삶을 토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대역사가 펼쳐졌다. 그러나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 몸종 하갈과 동침, 서자인 이스마엘을 얻은 순간의 그는 한낱 죽음용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적자 이삭과 서자 이스마엘의 갈등은, 4천년이 자난 지금까지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전쟁과 상호 살상으로 이러지면서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을 허물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학살과 자살 테러의 유혈 참극의 근원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한 생명용품인 동시에 역사를 허문, 아니 지금도 허물고 있는 죽음용품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우리가 본받아야할 진면교사 혹은 정면교사인 동시에, 닮아서는 안 될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가 우리 삶을 왜 평생 생명용품으로 일구어야 하는지 자신의 삶으로 웅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그릇된 삶으로 인해 미래의 한 부분이, 역사의 지평이 어떤 의미에서든 허물어진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